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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단상] 연예인, 무엇이 그들을 절망케 하는가

seoulpost서울포스트 2007. 2. 15. 12:18
[단상] 연예인, 무엇이 그들을 절망케 하는가
'친절한 안내자'로서의 미디어 역할이 사회를 지탱해
양기용 기자 (기사입력: 2007/02/15 01:46)

몇 년 사이 까마득한 곳으로 점프해 버린 겁없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비율로 보면 5000년 역사상 최근 10년이 피크를 보인 것 같다. 이는 혼란과 박탈과 상실감에서 오는 비장함이요, 소외와 무력감에서 오는 결단이다.

사회학에서 일컫는 그런 집단은 기득권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있다(사실은 거리 지워짐의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인 경우가 더 많다). IMF이후 우리가 재사회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방임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결과에 책임지지 않을려는 시장경제를 걸고 내부적으로는 비밀리에 입맛에 맞춰 철저한 규제와 통제를 가한 바, 초법적인 혜택을 받고 제도권에 달라붙은 계층이 있는가 하면 관습 앞에서도 쓰러져야하는 다수의 계층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요전날 아침 신문을 보면서 '정다빈 죽은 채 발견'이라는 기사를 대하고는 믿기지가 않아 많은 시간을 혼란속에서 보냈다. 첫째, 우리신문에 기사화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두번째, 해맑은 청순미를 보인 그가 왜 이 사회를 떠나야 했는가의 물음이었다.

장국영은 왜 죽었으며, 이은주가 간지 얼마나 되었는가. 그러고보니 정다빈은 근래 미디어에서 철저히 그 자취를 감추었었다. 갑자기 눈물이 팽그르르 떨어진 것은 지난 가을 아들과 도봉산행을 막 시작할 무렵 조카로부터 받은 어머니 소식을 떠올린 때다. 시간은 모두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간다. 생활에 반향된 그러저러한 사건 소식들도 지구의 운행을 방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 싯점이나 이 싯점이나 시간을 타고 흘러간다. 이 놈의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며 태평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차 한잔 타서 담배필터가 찌그러져라 씹으며 타자기 앞에 앉았다. 지면지와는 달리 포탈은 그의 사망기사로 도배되어 갔다. 좀 더 자극적인 비틀기에 사이버 편집자들은 쉴새없이 자판을 두드려 댔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연예신문사의 기사는 조회수와 댓글 알리기에 바빴다.

나는 최근에도 연예인들을 광대라고 부른 적이 있다. 언론을 다룬 아나운서가 사명감과 명예를 팽개치고 돈과 인기를 위하여 연예인 엔터테인먼트회사로 이직하는 것을 보고 이 사회에 광대문화가 도를 넘었구나, 생각했다.

문화선전 사업은 독재자의 전유물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뒤틀린 이상을 감추기 위하여 국민에게 문화라는 황색 저널시대를 열어 놓은 것이다. 군사정권 때의 3S나 최근 수 년에 광대들이 미디어와 방송을 장악(하게)하는 것은 북한예술단이나 기쁨조를 내세운 김정일 사고와 너무나 닮았다. 이 시대에 유독 심하다.

더 구체적으로 코스닥 연예인사업에서 소속사 개인은 챙길 때 챙기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본주가 쓰다 버린 총알같은 소모품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의 먹이 사슬은 보통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태로 엮여 있는 경우도 있다(카더라). 김태촌과 권상우의 진실게임에서 보듯 만약에 여자 연예인인 경우라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겠는가.

결국 그의 죽음에 미스테리를 제기하며 부검까지 갔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수치의 한 단면이다. 이는 시사평론가 정관용씨가 지적한 포탈의 연성뉴스 취급 행태와 무관치 않다. 심각한 것을 싫어하고 뻔한 것을 찾는 이용자를 위하여 연예뉴스 편집에 비중을 크게 두기 때문에 인기기사 톱10에 5위까지는 연예관련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문을 통해 그러한 연성기사보다는 탐사, 분석, 칼럼, 기획물 같은 것을 전면에 배치해 방문자가 질 높은 교양물을 먼저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라며 '친절한 안내자' 역할도 당부했다.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 다큐물은 세계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친다. 방송사는 망할지라도 그러한 프로그램으로 인해 그들의 제작물은 전세계인에게 언제나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간다.  드라마와 웃음 프로가 우리들의 안방과 머리속을 지배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다큐멘터리가 공중파 중에서는 가장 지적인 교양물의 위치에 있기에 우리의 방송 편집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정다빈은 마를린먼로의 죽음처럼 미스테리하지도 않다. 광대가 판치는 미디어가 그를 죽였고, 미디어의 책임을 방임한 부패 정부가 죽인 것이다. 더 나아가 뻔한 얘기를 시시콜콜 뻔하게 하기 좋아하는 우리들이 그(들)를 죽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이 칙칙한 욕망의 해방구를 찾기 급급할 때 그들은 진정한 낙원을 찾아 떠나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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