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포스트연재

[서울포스트. 서울포스트뉴스] 아랍남자의 청혼

seoulpost서울포스트 2006. 3. 22. 14:52
뉴스 HOME > 박근하와 여행가자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사 메일전송 기사 출력
아랍남자의 청혼
Do you want Algeria visa? Married with me!
박근하 기자 (기사입력: 2006/03/21 01:23)

Do you want Algeria visa? Married with me! (알제리아 비자가 필요해? 나랑 결혼하면 돼!)
Do you want Libya visa? Married with me! (리비아 비자가 필요해? 나랑 결혼하면 돼!)
Do you want America visa? Married with me! (미국 비자가 필요해? 나랑 결혼하면 돼!)

사막의 나라 니제르를 떠나겠다고 공항으로 가던날 아침..그는 나를 직접 공항까지 데려다 주면서도 분을 참지못해 소리쳤다.

이국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겪는다는 어느 왕족과의 로맨스.. 그리고 아랍 대부호들의 청혼..

아가데즈에서 잠시 묵었던 주유소와의 인연으로 나는 니아메이에서도 같은 주유소에서 머물렀었고 이들의 말에 의하면 서아프리카 전역에서 집안의 형제들이 함께 주유소를 여럿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 일꾼들이 전통복을 입고 주유소의 옥상과 마당에 살고있다는 것이 왠지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끔찍한 것 같다. SPN

"아랍형제들은 모두 당신을 환영합니다" 라고 유창한 영어로 기분좋게 나를 맞아줬던 그와 내가 친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사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맘에 들었나 보다. 사촌들 중에서 유일하게 약혼녀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막내손자. 자신의 집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날마다 주유소로 와서 이것저것 동양의 풍물을 묻는다. 주유소는 할아버지의 것이고 손자들은 단순한 일꾼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일이 끝난 후에는 자가용으로 니아메이 전역의 명승지를 구경시켜주면서도 아랍남자답게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이놈들의 상속 개념이 어찌되는지 모르니 얼마나 부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눈에는 다들 부자들로 보인다.

왜소한 체격에 막내아들이라고는 해도 신중한 성격이다. 그는 여행자인 내가 무얼 원할지 잘 알고 있었다. 니아메이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호텔 레스토랑을 추천해 주었고 (그는 끝까지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은 안믿는 눈치였다.) 니제르 전통시장을 함께 돌아다니며 낙타뼈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니아메이의 숙소 정도이다. 아랍 형제들의 집집마다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하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는 제의도 받았지만 형제들은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하인들을 부릴 뿐 혼자사는 총각들이었다. 친해지면 모를까.. 처음 만났는데 혼자사는 총각집에 눌러앉기도 그렇고.. 나는 이번에도 주유소 옥상에서 하인들과 같이 머무르겠다고 억지를 부려야했다.

◆ 주유소 일꾼들과 같이 머물렀던 옥상의 간의 침대. 한명의 믿을 수 있는 친구보다는 모두와 함께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 내 여행 철칙이다. SPN

그는 기특하게도 나를 주유소 옥상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호텔까지 예약해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호텔비도 그가 낼 것이 뻔 할테고 무엇보다 그의 방은 내 옆방이 될 듯하여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니아메이에 볼 일이 없었다. 테네레 사막을 건넜으니 한국행 비행기가 있을 이집트로 들어가기 위해 국제 공항을 찾았을 뿐이다. 이제는 대학 4학년.. 학교는 벌써 개강하고 이미 수강신청 정정기간도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니제르의 수도 니아메이에서 컴퓨터 No-Working으로 비행기표를 사지 못한 채 4일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밤 리비아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또다시 5일을 기다려야 한다. 또 이집트에서 한국행 시간표도 다시 확인해야만 한다. 결국 가방을 싸서 그를 끌고 무작정 니아메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그는 친구라는 리비아 영사를 만나 스탑오버에는 비자가 필요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후에서야 나를 국제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다.

근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국제공항에서조차 컴퓨터가 없기 때문에 비행기표를 살 수가 없다고 한다. 한나라의 수도에 있는 국제 공항에서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가 없다니.. 그게 말이 돼? 나는 주유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사헬지대에 속하는 니아메이의 더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남은 화가 나서 미칠지경인데 그는 유쾌하게 웃는다. 음악을 틀고 신나게 달리더니 나를 인적이 없는 니제르 강가에 내려준다. 실컷 비명을 지르라고 했다.

늦은밤이었다.. 그는 내 기분전환을 시켜줄 장소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더니 결국 어느 바에 데려갔다. 아프리카에서 양주를 마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나는 J&B를 한잔 시켰다. 그는 시키지도 않은 얼음을 추가해서 주문했다. 현지인이 계산하는 자리에서도 가격을 주의깊게 보는 것은 여행자들의 습성이다. 난 한잔을 시켰는데 꽤 큰돈을 낸다. 팁인가? 자연스럽게 그가 음악을 즐기며 내게 말을 거는 사이 바텐더는 얼음 위에 석잔의 술을 따랐다.

마음속에서 한숨이 나온다.
이런 수법들.. 이제는 지겹다. 언젠가 한국에서 파키스탄 노동자도 같은 수법(?)을 사용했었지만 아프리카 상당지역에서 이정도는 속임수에 속하지도 않는 것 같다. 단순히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내 주문 이상으로 술을 사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도 맘에 드는 여자랑은 술을 마시고 싶은것이 남자들의 심리라고 했던가..?

석잔의 술 외에 다른 것은 없는 듯하여 한번에 들이켰다. 그는 나를 보더니 감탄했다.
술집에서 나를 위한 특별 식사를 주문하더니 내일은 비행기티켓을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내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래도 나와 있을 시간이 길어진 것 같아 행복하다는데... 5분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친구였던 이자식.. 이날 이후로는 명백한 작업모드에 돌입했다.

처음에 나를 환영해 줬던 아랍형제들도 이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듯 했다. 뭔가 해주고 싶은 것이 많은 듯도 보이지만 불어가 안통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여행자 숙소가 아닌 중심지에서 꽤 떨어진 주유소에 묵고 있는 나로서는 식사부터 외출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는 이제 만날 때마다 노골적으로 한국의 결혼 문화를 묻는다.

니아메이에서 머물렀던 2주간..아무리 아랍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강조해도 그는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고 웃기만 하더니 이제는 아예 날마다 주제를 바꾸어 갖가지 프로포즈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밤은 같이 호텔에 가자는 에로틱한 분위기 연출부터.. 한국인 부모님을 먼저 만나야 하냐는 문화적인 질문.. 아랍남자의 청혼을 부모님이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걸릴 것인가..? 자신이 막내아들인 관계로 집안 사람들 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결혼허락에 관한 사항들. 또 자신의 인생 계획은 주유소사업을 물려받기보다는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은 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기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함께 할 여자가 필요하다나 뭐라나~

◆ 니아메이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촌들은 모두 네 명. 너네 사촌들은 모두 몇 명이야? 질문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SPN

그는 항상 신사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서 그의 작업은 점점 치근댐으로 느껴졌다.
나를 붙잡아두기 위한 사소한 거짓말과 행동들이 점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가 내가 가까운 시일내에는 비행기표를 살 수 없도록 여행사 사장에게 직접 전화해서 부탁했음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됐냐고? 여행사 사장이 그의 지시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후.. 넷상에 아프리카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그의 이야기도 간단하게 곁들였다.

- 아랍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
서부 아프리카전역에 주유소를 체인점으로 운영하는 집안이다. 집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고 했다.
근데..암만봐도 여러 아들 중 촉망받는 놈이 아닌듯 싶다...결정적으로 얘네 집안은 주유소만 여러 개 있을 뿐.. 유전이 없다. ㅡ.ㅡ+

떠나겠다는 날.. 이놈은 분을 참지 못하고 내게 소리쳤다.
Do you want Algeria visa? Married with me!
Do you want Libya visa? Married with me!
Do you want America visa? Married with me!
...안 원하는데.. 근데 한국인 비자 안된다는 거 어찌 알았을까.. ㅡ.ㅡ;;


나를 아는 수많은 남정네들의 장난섞인 악플들을 받았다.

"남자보는 눈이 너무 높은거 아냐? 한국에서 두눈 씻고 찿아 봐라 유전가진 남자가 있나."
"당신 집안의 재산은 얼마요? 정말로 시집갈 생각은 있는거요? " ...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아는 사람이 유럽의 왕족이나 아랍부호들에게 청혼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럴때면 나도 그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에 산다는 주유소 재벌집 손자에게 청혼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사실 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가장 듣고 싶어하는 여행이야기들 중 하나인 것 같기는 한데.. 정말로 '청혼받았다'는 말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뭐가 진실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사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실이 없다는 생각도 가끔 하게된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해석하기 나름이고 말하기 나름아니던가. 그래도 한가지는 알 것 같다. 한국여자가 외국에서 백마탄 왕자님과 로맨스에 빠지는 일이 있다한다면..결코 우리가 상상하는 한국식 로맨스는 아닐텐데.. 사람들이 사소한 이야기들은 생략하는 거겠지.


박근하 기자의 서울포스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