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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수필>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seoulpost서울포스트 2006. 12. 30. 23:38
<수필>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양기용 기자 (기사입력: 2006/12/30 13:21)

옛적 아버지는 흰머리 한 개 뽑는 데 1원도 안쳐 주셨다. 그래도 이리저리 뒤적여 뽑다보면 몇 원이 되어 나는 그 돈으로 오다바도 사먹고 아껴놨다가 엿도 사먹었었다.

21C에 (초등2학년 아들) 아버지3세와는 한 개당 10원으로 계약했다. 몇 백원이 모아지면 녀석은 집 앞 가게 오락기로 달려간다. 쪽집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유희 대상에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엊그제는 흰머리를 뽑으며 "아빠, 절규 알어?"라고 물었다. 느닷없는 물음에, 절규라...설마 얘들 나이에 그런 그림을 알 리 없을 거고, 안다면 교육적으로 별로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 때문에 조심스럽게 "입 벌리고 있는 거?"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양손을 자기 볼에 대고 합죽이 모양으로 입을 벌려 "뒤에 사람 둘이 있잖아~"라고까지 표현해 냈다. 아차 싶었다.

내가 포스트 피카소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뭉크의 그림 전 편을 본 것은 30대 때였다. 노총각으로 문학서클에 나갈 때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그 등단 시인에게서 받아 본 것이 처음. 그가 뭉크의 화집을 나에게 선물(?)한 이유를 아직도 모를 일이지만 몇 장을 넘기다가 나는 충격을 받아 기절할 뻔 했다.

시장 바닥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굴비들의 절규와도 같은 인간의 극한적인 절규 - 아우슈비치수용소 가스실 속의 유태인같은, 731부대 실험실 앞의 여자같은, 십자군 앞에 잡혀있는 무슬림같은, 부군 루이16세와 단두대 앞에선 앙투와네트같은, 저승사자와 숨바꼭질하는 처녀귀신같은, 그래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절규...

그 그림들을 본 후 간땡이가 크다고 자부한 내가 공포감까지 들어 1주일 가량은 밥을 먹지 못했다. 집에 와 바로 버리면서 야화라면 차라리 좋았을 걸..하고 그녀를 원망했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 그가 뭉크를 낙관한 것과 나의 충격의 원인을 스스로 알아 차렸다.

심리학에서는 그림이나 음악 등을 통해 심리상태를 알아내고 치유하는 방법이 있다. 안정이라는 평상심을 찾아가는 데 감상을 통한 반응이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한 편으로 치닫는 원심에 구심점을 찾게하는 것이다. 어디 그 방법에 그림이나 음악 뿐이겠는가.

그녀의 문체는 늘 격렬했다. 많은 작가나 예술가들이 흔히 겪는 일이지만 퇴폐와 탐미, 허무에 항상 근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극한에서 불세출의 음악이 나오고 그림이 나오게 된다. 예술이란 일상을 뛰어 넘는 순간의 포착이라서 흔히 혼이 실린다든가 피로써 표현한다는 말을 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끼가 있다.

뭉크나 피카소의 그림도 대부분 극한을 표현한 작품이 많다. 그녀의 시어가 극렬했던 것도 그러한 부분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일정 부분 그러한 삶이었으리라 짐작 되었으며 나 또한 강렬한 비상구가 절실했던 시기였다. 나의 충격은 과거부터 당시까지의 고백이었던 셈이다.

오락기로 달려 나간 아들에게 500원을 주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꿈꾸듯 스케치를 했다 :
초등학교에서 뭉크의 그림을 가르칠 정도로 교육이 진보했는가?
또는 그만큼 아이들이 지적 성장을 했는가?
결국 자기 보신에 충실한 전교조풍의 교육이 그것인가?
우리 어릴때는 아기송아지가 엄마송아지 젖 먹는 모습을 그릴 정도로 선생님은 소박했다.
요즘 선생들은 아빠가 엄마 젖 먹는 모습을 그려봐라고 하지 않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본대로 표현한 것은 밝고 건강하다는 증거다. 아들 자랑의 푼수를 더 떨자면 녀석은 자라면서 한번도 빽빽 울지 않았고 징징대지 않았다. 아무 녀석이나 집으로 끌고 들어와 집안 온통 어지러 놓고..사귀는 여자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했더니 걔가 기절했다는 말이 그 중의 백미였다. 못해준 아빠가 늘 미안할 뿐.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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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 조현석.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1
한밤의 심한 갈증, 깨어나, 얼어붙은 빗장을 연다. 꿈꾸는 철길, 달빛 내리고, 이상하다 숨죽인 나는, 오랜 갈증을 느끼며, 소양교 난간 나트륨 등빛의 겨울을 뒤집어 쓴 화가, 만난다 바람이 지난 후

저절로 닫히는 덧문, 내 혀가 끼인다.

2
달빛 없는 밤. 서럽게 운다, 절반의 어둠이 가리운 문틈에 끼인 붉은 혀와 초저녁부터 바람에 술렁이던 마을을, 문밖 세상으로 돌아간 화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애당초 말을 하고 싶었다
짧은 혀 끝으로 더듬거리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겨울은 언제 시작하였는지, 눈을 감자
잠의 바닥에 깔린 들판을 가로질러

밤새워 폭설이 덮이고, 이미 낮은 세상은 더 낮아지고, 길눈의 거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며 몇 겹의 죄를 이고 지금 나는 섰는가

3
입을 굳게 다물어도 나의 고백은 쏟아지고
얼어간다. 놀라운 폭설이 그친
하늘은 고요하다, 붐비던 개찰구를 빠져나간
나의 꿈은 검은 버들처럼 잎지는
텅빈 驛舍에서 겨울로 지고 있다.

4
불투명한 유리가 깔린 땅 속으로 녹아내리는
내 속울음이
뿌리 내리는 겨울숲 사이
얼지 않은 물소리가 조심스레
한 옥타브 낮게 늦은 오후를 가득 메우고
짓눌린 오후를 떠다니는 아, 그 그
화가의 떠나지 않는 겨울
숲, 낮게 내려온 하늘을 깡마른 손으로 더듬는
겨울숲, 찾아드는 밤새떼, 종일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나무, 또 눈이 내리고

숲에서 잃어버린 말이여,
나의 근시안에 각질의 어둠이 배고

순간, 온 마을이 일제히 켜드는 불빛
살아 있을 누군가의 지상에 덮인
눈이 부시다 눈이 부시다.


** 군사정권이 계속된 80년대는 절망적인 현실을 주제로 한 시가 주를 이뤘다. 건조한 시 분위기에서 맘껏 노래하지 못한 응어리를 읽을 수 있다. 당시 시풍은 화려하지 못하고 주로 우울했음을 보여준다. 하긴 시인의 현실은 과거나 현재나 우울이고 절망이며 '술 권하는 사회'이니..-양기용-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1863-1944]
- 죽음보다 격렬한 삶, 절망과 죽음의 심연에서 분출해 낸 구원의 노래

노르웨이 뢰텐 출생.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성격자였으며,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결핵으로 여의고, 그 자신도 병약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1884), 급진적인 그룹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1889년 한여름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보내고, 신비스러운 밤의 불안을 잡아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으나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목판화(木版畵)와 피사로와 로트레크의 작품이었으며, 고갱과 고흐의 매력이었다.

1892년 가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는 말라르메 등과 사귀고 입센을 알게 되었으며,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聯作)을 완성하고,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19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봄》 《질투》 《절규》 《다리 위》 《저녁시간》 《죽음의 방 The Death Chamber》등의 작품이 있다.

관련사진  l 작은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사진을 보실수 있습니다.
△ 절규 The Scream, 1893
△ 춤 The Dance of Life, 1899-1900
△ 백야 White Night, 1901
△ 다리위 Girls on a Bridge, 189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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