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 14대 봉상왕. 그는 어린 시절부터 궁중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보고 자랐다. 그가 임금이 되어서도 주변을 의심하며 많은 숙청을 감행했다. 그의 조카인 을불은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참화를 피하여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남의 집 머슴살이, 소금장수 등의 미천한 직업을 전전하며 갖은 핍박은 당하면서 근근히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민심은 천심이다. 백성이 외면하는 지도자는 하늘도 외면한다. 봉상왕 치하에 천재지변과 흉년이 거듭되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식인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임금은 궁궐증축에 여념이 없었다. 어린 청소년들까지도 강제 동원하여 혹사 시켰다.
원성이 하늘로 치솟자 보다 못한 재상 창조리가 간언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해야 할 때, 배고픈 이들을 끌어다 지치도록 일을 시키니 만 백성의 부모 된 책임을 어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상왕은 오히려 창조리를 협박했다. ‘임금이란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해야 위엄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법이요. 지금 재상이 나를 비방하여 민심을 얻으려는 것이요? 그대가 백성을 위해 죽겠소?’
명 재상 창조리의 정치철학은 분명했다. 백성을 돌보지 않는 임금은 더 이상 자격이 없다. 혁명을 계획한 창조리는 조불과 소우를 보내 을불을 찾았다. ‘나는 왕손이 아니라 거렁뱅이 평민일 뿐이요’라고 우기는 을불의 남루한 옷차림과 앙상한 모습에서 왕손의 기품을 찾아낸 그들은 그를 설득하여 창조리에게로 모셔 갔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창조리는 드디어 봉상왕을 몰아내고 을불을 옹립하니 이분이 미천왕이시다.
머슴살이를 하며 하류인생의 비참함을 몸소 깨닫고, 소금장수를 하며 고구려 방방곡곡의 서민생활을 체득했던 미천왕은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세세히 보살피는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국위를 선양했으니, 그의 증손자인 광개토대왕의 전성기를 열어가는 기반을 닦아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 조 말엽에, 강화 머슴애가 임금이 되었으니 이분이 철종이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펴기는커녕, 사욕에 눈이 먼 안동김씨들의 꼭두각시에 불과 했고, 이때 국운은 급속히 기울게 되었다.
‘지난 대선 때 노무현을 왜 찍었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고졸 인권 변호사로 서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 것으로 믿었었다’고 한다. 과연 그는 선정을 베풀었는가?
고생했다고 다 훌륭해지지는 않는다.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돈 좀 벌었다고, 지난 시절을 잊고 군림하려는 ‘졸부’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금년 대선에서 미천왕과 같은 성군이, 그리고 창조리와 같은 명 재상이 나오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 무리일까?
▣ 2007, 3, 4. 재미교포 자유기고가 심 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