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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여행기) 한라산 설문대할망의 전설-남한 최고봉 종주기

seoulpost서울포스트 2006. 11. 13. 18:25
(여행기) 한라산 설문대할망의 전설-남한 최고봉 종주기
아침을 여는 참 좋은 느낌 中
최복현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6/11/10 12:21)


2006년 11월 3일 바다를 건너가기로 하다. 제주도! 꼬박 만 15년 만에 찾게 되는 곳이다. 조금은 마음이 설레기도 한다. 6시 50분 출발하는 밤 비행기를 타고가려니, 비행기가 이륙 후 한 동안은 도시의 불빛들이 깜박거린다. 퇴근시간 무렵이라 하늘에서 배려다 보는 도로에는 자동차의 불꽃들로 가득차있다. 어디 한곳 차가 밀리지 않는 곳이 없다.

서울의 모습들, 한강다리의 불빛들이 멀어지는가 싶으면 인천 시내의 불빛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40여분이 자니면서는 망망한 대해인가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비행기 저 아래로 별빛들이 하나 둘 보인다. 그렇다고 비행기가 별보다 높이 올라간 것은 아니다. 저 아래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배들의 불빛들이 하늘에 별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바다가 하늘이고, 그 떠도는 배들이 별이다.

그렇게 제주도 땅을 밟는다. 이국적으로 보이는 도시, 무엇보다도 내일 아침이면 오르게 될 한라산을 떠올리니, 설렘이 인다. 15년 전에 뵈었던 이곳 탐라서적 사장님께 전화를 건다. 아직까지도 나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 15년 전, 풋내기 시인으로 시집을 몇 권내고 사장님을 뵈었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그때만 해도 직원이 많지 않은 서점이었기에, 내 시집을 한 권씩 직원들에게 사인하여 나누어 주었었다. 그때 사장님은 직원들을 모두 불러서 내 앞에 세우고는 책을 받도록 하셨다. 참 독특하시고 누구에게나 예의를 갖추시며, 원칙을 중시하셨던 분이라 내 기억 속에 늘 남아있던 분이다. 전화를 거니 아주 반갑게 맞으신다. 일정 중에 내일 한라산에 오를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내일 아침 5시 30분에 전화를 할 테니 같이 등산을 하시 잔다. 그렇잖아도 등산은 혼자 해야 할 판인데다가 교통편도 모르는 터라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아침 5시 일어나자마자 씻고 옷을 갖추어 입고 전화를 기다렸다. 5시 30분, 전화가 오지 않는다. 5시 38분 여지없이 전화가 왔다. 내가 있는 위치를 대강 설명을 하고, 큰길가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하여 15년 만에 재! 회, 그분이 손수 운전해 온 차를 타고 관음사를 향해 출발한다.

관음사 휴게소 500미터 전방쯤 가도록 캄캄하다. 그런데 2차선 도로 중 길 한편을 완전히 차지하고 서있는 봉고차가 있다. 이 으슥한 길 위에, 비상 깜박이만 켜 놓은 채, 우리가 신호를 보내도 그대로 있다. 그냥 가실 리가 없다. 내려가서 무슨 일이 있나 확인을 해보라신다. 조금은 겁이 났지만 내색을 않고,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차문을 똑똑똑 두드려본다. 혹시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면 나 매 맞는다. 대답이 없다. 다시 똑똑똑……. “응답이 없는데요.” “안을 좀 들여다봐요.” 어쩌랴. 용기를 내어 차문을 당겨본다. 어라 차문이 쉽게 열린다. 그런데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결국 경찰서에 신고하기로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분을 모셨으니 어쩌겠는가. 그렇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위치를 알려주고는 다시 우리의 길을 간다. 조금 올라가니 바로 관음사 휴게소, 이 새벽에도 돈을 받기 위해 지키고 있는 관리인이 있다. 서울과는 다르다.

드디어 산행시작이다. 6시20분이다. 올해의 목표로 삼았던 한라산이다.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영산, 금강산과 지리산과 더불어 3대 영산이라는 한라산, 높디높아서 저 하늘에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높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한라산이란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올해 안으로 어려울 것 같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 목표가 이루어진 것이다. 누구나 목표를 정하든, 꿈을 가지든 뭔가를 갖게 되면 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어쨌든 그 방향으로 움직이며 노력하게 되어있다. 체력이 필요하면 체력을 키우고, 돈이 필요한 일이라면 아껴서 저축이라도 할 것이다. 그래서 굳건히 꿈을 갖고 있으면, 다부지게 목표를 잊지 않고 있으면 거기에 근접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조금은 배가 고프다. 난 등산은 아주 잘하는 편이다. 오르막은 웬만한 산은 시속 4키로, 내리막은 보통으로 5키로, 빠르면 6키로까지는 걸어가니까 말이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나에겐 쥐약이다. 그런데 사장님은 산행 중에 식사를 안 하시고, 물도 안 마신단다. 그래 가보는 거다. 그렇게 5분 정도 올랐을까? 그만 사장님이 차 열쇠를 잃어버린 것 같단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집어 봤지만 없다. 할 수없이 되짚어 내려온다. 조그만 헤드랜턴으로 길을 비추며 다시 내려온다. 아뿔싸, 차키는 차문에 꽂혀 있었다. 다시 오르기 시작한 시간이 6시 35분이다.

한라산 땅을 밟아간다. 아주 먼 옛날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더란다. 이 할망이 한라산을 만들었는데, 힘이 아주 장사였다고 한다. 삽으로 흙을 파서 7삽을 던졌더니 지금의 한라산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할망은 어찌나 컸던지 잠을 잘 때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웠는데, 그러면 다리는 재주해협의 관탈섬에 걸쳐졌다고 한다. 빨래를 하는 때면 한라산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서 한쪽 다리는 관탈섬에 걸치고, 한쪽 다리는 마라도를 디디고는 우도를 빨래판으로 삼아서 빨래를 했다니 무지하게 컸나보다. 그리고 한라산 자락마다 곳곳에 오름이라는 것들이 있다. 이 오름들은 아마도 서울 사람들은 봉우리라고 해야 이해할 것 같다. 단지 옆에서 보면 아주 큰 무덤처럼 생겼는데, 봉우리 한 가운데가 움푹하게 파여 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일종의 한라산에 백록담이 있듯이 애기 한라산들이라고 해야 할까, 한라산이 폭발하고 나서 흘러내려가면서 다시 폭발한 작은 화산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들을 제주 사람들은 오름이라고 부른다. 오름! 아마도 동사인 산을 ‘오르다’의 명사형인 것 같다. 이 오름들은 전설에 의하면 설문대할! 망이 한라산을 만들 때 치마에다 흙을 퍼 나르는 중에 치마에 구멍이 생겨서 그 구멍 사이로 흙이 빠져나와서 생긴 봉우리들이라고 한다.

이 한라산을 올라가는 것이다. 한라산 등산로는 돈내코, 영실, 어승생, 성판악, 관음사코스가 있는데, 최정상인 백록담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는 관음사코스와 성판악 코스 두 곳 뿐이다. 우리가 오르려는 관음사코스는 8.7키로 인데, 성판악 코스에 비해 경사가 조금 심해서 잘 찾지 않는 코스라고 한다. 그러나 삼각 산이나 지리산에 비하면 아주 양반 코스인 셈이다. 탐라 사장님은 앞서가시면서 많은 삶의 교훈들을 들려주신다. 30여분 올라가니 숯 가마터가 나온다. 오르는 길이지만 험하지도 않고 명상을 하며 걷기에 좋은 길이다. 아름답다. 적당히 나뭇잎들이 길 위에 떨어져서 분위기를 자아내준다. 어린 왕자를 위해 융단이라도 깔아 준 듯싶다. 제주도에서나 불 수 있는 것일까. 적송들이 유난히 곧게 자라난 솔숲이 있다. 하늘을 향해 불그스레한 기둥을 세우듯 빽빽이 늘어선 소나무들이 운치가 있다.

“나무들이 혼자 자라면 세상 넓은 줄 모르고 멋대로 자라다 보니 구부러지곤 하는데, 이렇게 여럿이 더불어 자라면 곧게 자라는 것이지. 그래서 사람도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 사람답게 성숙해지는 것일세.”

제주도, 제주도는 나에게는 사막과도 같은 곳이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 사막과도 같은 곳이다. 어린 왕자에게는 여우가 현자이었듯이, 이 사막에서 나를 찾아준 이분이야말로 인생의 현자인 것이다. 그분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빠른 속도로 쉼 없이 올라가신다. 다시 30여분 올라가니 탐라계곡이 나온다. 이 탐라계곡은 오르는 중 유일하게 잠시 내리막인 곳이다. 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계곡을 건너가면서 왼쪽으로는 동탐라 계곡, 오른쪽으로는 좌탐라 계곡이다.

이 양 계곡 사이에 있는 능선은 지도상으로 보면 개미등처럼 생겼다. 그래서 지금 올라갈 능선이 개미등이다. 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좁은 능선이 되는데, 이 곳은 개미목이다. 개미목을 지나 면서 문득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봉우리, 삼각형모양으로 우뚝 서있어서 삼각봉이라한다. 제일 높은 오름이 장구목의 하단 부분인 셈이다. 이 삼각봉은 해발 1695미터인데, 오르고 싶은 욕구가 치솟지만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이 삼각봉 위로 완만하면서도 금빛 능선이 우아하게 백록담으로 이어지는데, 건너편에서 보면 여지없이 우리 옛 악기인 장구목처럼 생겼다. 백록담 북봉에 해당하는 오름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이 장구목이 한라산에 있는 오름들 중 가장 높은 오름으로 해발 1813미터이다. 이 장구목을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동탐라계곡이 시작되고, 서쪽으로는 장구목 하단인 삼각봉으로, 그 아래로는 서탐라계곡이 시작된다.

이 삼각봉 아래에는 나그네들 쉬어가라고, 두어평 넘짓한 평상 마루가 깔려있다. 잠시 이 곳에서 쉬기로 한다. 함께 갔던 탐라사장님은 여기서 하산하실 것이란 한다. 함께 쉬면서 너무 배가 고픈 터라 가지고 간 소시지를 꺼내서 4개를 먹고 나니 힘이 솟는 것 같다. 거기다가 초콜릿 3개를 더 먹어치운다. 8시 15분이다. 거기에서 20여분을 쉬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중에 모처럼 생명을 발견한다. 우리보다 30분 후에 출발했다는 분이 도착한다. 꽤 빠른 걸음 인 것 같다. 초콜릿을 나누어 주고 나서 함께 오르기로 한다. 궁금하기도 하다. 아직까지 나보다 빨리 오르는 사람을 본적이 없는데, 궁금해진다. 사장님은 하산하고 나는 그분의 뒤를 따라 오르기로 한다. 왼쪽으로는 왕관능이 보인다. 일종의 오름이라고 해야 할지, 바위들이 모여서 마치 왕관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왕관 능은 높이가 150미터, 둘레는 822미터라고 한다. 이도 일종의 오름인 셈이다. 오른쪽 위로는 금빛 능선이 보인다. 나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 노란 풀들이 깔려있는 모양이 마치 잔디밭처럼 보인다. 앞에서 이야기한 한라산에서 제일 높은 오름인 장구목 ! 오름이다.

삼각봉 발치를 끼고 돌아서 약간의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에 약수가 있으니 한라산에서 제일 높은 샘인 것 같다. 일단 귀한 물이니 목을 축이고, 병을 비우고 물을 채운다. 이 물이 용진각물이다. 여기서 발원된 물의 수량이 제주에서는 제일 많은 수량이라고 한다. 그 물을 서울로 공수할 생각에서. 여기서부터 1시간여 오르면 정상에 오를 것 이라고 한다. 동행하는 분은 한라산에 12번째 오른다고 한다.

용진굴을 지나면 용진각 대피소가 초라한 모습으로 반긴다. 용진굴의 이름은 개미목을 넘어온 용이 자리 잡은 곳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 곳에 있는 대피소의 이름도 그래서 용진각 대피소이다. 이 대피소를 지나면서는 공사 중이라 거치적거리는 것이 많아서 옆에 깔아놓은 레일 위로 걷는다. 그분은 그 레일 위를 잘 걷지 못해서 내가 다시 앞장을 선다. 그렇게 가다 보니까 그 분은 뒤로 쳐지기 시작한다. 그냥 꾸준한 속도를 유지하며 오르다가 아무도 없기에 기왕 한라산에 온 기념으로 내 몸의 물을 비워낸다. 그리고는 장구 목을 바라보면서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오르는 도중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괴물 같은 나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70도에 이르는 경사지를 10여분 오르고 나니 왕관능위에 올라선다.

그 다음부터는 경사가 약간은 완만해 지는 오르막이다. 야트막한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정상이 바로 앞에 나타나며 북쪽으로 높이 솟은 돌 벽 안으로 백록담의 속살이 보인다. 하지만 그 위로 곧장 오르는 길은 금지되어있다. 그래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평평한 길을 따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재주시의 모습이 저 아래 보인다. 그렇게 걷다보면 서너 명은 족히 들어감직한 자연 동굴이 길 옆에 있다. 그곳을 돌아서 5분여 오르면 바로 백록담이 아래에 보이는 정상이다. 시간을 보니 9시 25분이다.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2시간 50분이 걸린 것 같다.

정상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혼자서 백록담을 카메라에 담는다. 하지만 백록담에 있으리라 기대한 푸른 물결은 어디에도 없다. 메마른 할머니의 가슴처럼 양쪽으로 갈라진 곳에 자작거리는 물이 조금 있을 뿐이다. 이 백록담은 신선이 하늘에서 하얀 사슴을 타고 내려와 물을 마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백록담은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산 정상에 있는 화구호로 둘레는 1.72킬로미터, 넓이는 63000평에 이르는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라 잠시 더 쉬기로 한다. 그렇게 조금 있다 보니 성판악 쪽에서 두 사람이 올라온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그분들이 나누어준 제주 감귤 3개를 맛있게 먹어치운다. 그러면서 집으로 갈 때는 감귤을 사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해발 1933미터, 제일 높은 곳 1950미터인 북벽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갈 수가 없다. 20여분 노닥거리고 있다 보니까 갑자기 비가 흩뿌리는가 싶더니 안개가 자욱이 밀려온다. 더 이상 백록담은 내려다 보이지 않는다. 내려갈 준비를 하려는데, 아까 만났던 그분이 정상으로 다가온다. 이어서 성판악 쪽에서는 꽤 여러 명이 올라온다. 9시 57분 성판악 쪽으로 출발하기 전에 회사 동료들에게 전화를 건다. 하산을 시작하니까 12시에 성판악 휴게소로 차를 가지고 오라고. 그리고는 하산을 시작한다. 경사가 제법 심한 내리막이다. 밟히느니 돌밖에는 없다. 내려오는 도중에는 계속해서 오르는 사람들이다. 많기도 하다. 인사를 하면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받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인사를 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그래서 인사를 하지 않으니까 상대도 인사! 안 한다. 지리산에서는 지나는 사람들 모두 인사를 나눈다. 이 곳은 지리산과는 다른 문화인가보다.

사람들이 묻는다. “벌써 정상을 돌아 내려갑니까?” 어떤 이는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묻는다. 그렇게 자연의 숲과 사람의 숲을 피하며 30여분 내려오면 진달래 밭이다. 대피소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운집해 있어서 서 있을 자리도 없다. 그래서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오다 보니 길 옆 저쪽으로 모노레일을 타고 물건을 운반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는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어가면 어울릴 만큼 참 좋은 길이다. 운치도 있고, 혼자 걷기엔 아까운 길이다. 그렇게 정상에서부터 한 시간여 내려오다 보면 다시 대피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널찍한 마당 비슷한 한쪽에 약수가 콸콸 쏟아진다. 사라약수이며 사라 대피소이다. 오른쪽으로 높이 솟은 사라 오름의 분화구에 있는 물을 끌어온 약수란다. 저 오른 쪽에 솟아있는 사라 오름은 면적이 5000평방미터나 된다고 한다. 그 높은 곳에 산정 화구호를 가지고 있으며, 그 호수 안에 물이 가득 담겨있다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갈 수가 없다. 약수 한바가지를 퍼 마시고는 다시 길을 간다.

이어서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잔디밭을 지나고 공터를 지나면서도 아름다운 길들이 이어진다. 이쯤이 성널오름의 옆구리를 지나는 중이다. 위에서 보면 저 봉우리들을 넘어가야 되니까 오르막이 나오겠지 하지만 오르막은 없다. 오직 내리막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전혀 없는 한라산이다. 샛길도 없이 오직 외길이다. 흠이라면 이 성판악코스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산이라는 생각을 잊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며 길을 걷는다. 떨어진 나뭇잎들은 사람들이 밟아대서 그렇지만 길은 명상의 길이다. 고적한 공원길 같다. 이제는 오르는 사람들이 조금 덜 하다. 진달래 대피소를 12시전에 통과하지 못하면 정상에 오를 수 없어서인지 오르다가 중간에 돌아가는 이들도 종종 눈에 띈다. 그렇게 이러저러한 생각에 잠기며 산을 내려오다 보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은 삼나무 숲이 나타난다. 여기저기 간목한 나무더미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

성판악, 백록담에서 출발하여 성판악 휴게소까지는 9.6키로 미터, 그곳에 가까이 내려올수록 고운 옷으로 단장한 나무들과 고적한 산길이 어우러져 나그네의 발길을 묶어두려 한다. 그렇게 길을 감상하며, 고운 단풍을 감상하며, 성판악 휴게소에 이르니 정확히 12시이다. 꼬박 2시간 3분이 걸린 셈이다. 성판악 휴게소는 해발 800여 미터 되는 것 같다. 건너편을 보니 큰 오름이 눈에 띈다. 물오름이다. 오름들은 주로 해발 1000미터에서 1500미터에 분포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라산 국립공원 내에는 46개의 오름이 들어 있으며, 제주도 전역에는 무려 368개의 오름이 있다고 한다.

물오름을 바라보며 지나온 한라산 길들을 되짚어보며 15분여를 기다리니 동료들이 차를 가지고 온다. 그 길을 돌아 서귀포 쪽으로 향한다. 한라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길, 5.16도로이다.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인 이 도로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가을 빛깔을 적절히 담은 이 길을 내려가노라면 나뭇잎들로 이루어진 터널 구간이 제 맛이다. 양쪽에 자연적으로 늘어선 나뭇가지들이 손을 뻗쳐서 서로를 간질이며 터널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가을빛을 담은 나뭇잎들이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운치와 시정을 자아낸다. 한없이 머물러 있고 싶은 길이다. 소소히 실수로 나뭇잎들이 파르락 거리며 길 위에 내려앉는다. 차량 통행도 많지 않은 고적한 이 길을 서울의 어느 변두리에 그대로 가져다 얹어두고 싶어진다. 너는 길이니 남는다. 나는 나그네이니 너를 딛고 디뎌서 멀어져 간다.

▣ 칼럼니스트 문필가 최 복 현


최복현 칼럼니스트의 서울포스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