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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Who'll Stop the Rain

seoulpost서울포스트 2006. 7. 26. 10:14
Who'll Stop the Rain
일상과 멍~상으로의 초대
양기용 기자 (기사입력: 2006/07/21 00:01)


장마가 이렇게 긴 날 동안 계속된 것이 참 오랜만이다. 예년 같으면 하루 이틀 오다가 머리 벗겨질 정도의 땡볕이 나곤했는데..한반도에 국지적으로 쏟아 부은 폭우로 인명 손실과 재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볼 때, 탈없는 하루가 늘 감사하다.

익명의 이웃은 비가 좋다고 했다. 폭염이 싫다는 단서를 붙여서 생각해 봤는데 더위는 더위대로 또 걱정거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수재민을 위해서 가상공간에 라면과 담뇨와 식수와 옷가지를 마련해 놓고 필요한 사람은 갖다 써라 하고서 일을 나간다.

비는 주룩주룩 내린다. 역사소설이나 인물론에는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라면 백성의 일상을 심각하게 위협할 천재지변이 생길 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우리의 지금 상황에서 진정한 지도자라면 온몸으로 비를 맞고 삼각산에라도 올라가 '止雨祭'라도 지내야 된다.

성경에 보면 바다가 갈라져서 백성들의 탈출을 돕고 바위를 때리니까 샘물이 솟는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백성을 팔아 지들 자리 유지하고 술잔에 백성의 피를 받아 마시고 있으니 이 비가 그칠리가 없다.

#1. 2006년 7월 20일 오후 3시 30분 종로 5가 h은행 앞 버스 승강장

빈 PT병이 모자라 광장 시장에서 30개 구매 후 모 씨와 통화.
'비가 와서 욕봤다. 고맙고, ..낼 만날 수 있냐?'
'...알겠으며..만나서 얘기하자'

옆에 젊은 청춘 두 명은 서로 바라보며 연신 싱글벙글대더니 女가 男 입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 댄다. 몰입..女의 입술이 男에게 가까이 갈수록 내 상체가 끌려갔다.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투명 나이론 브래지어 끈에 꼬리뼈가 보일 정도의 똥꼬2부 청치마..그들만의 프렌치 키스. 요즘엔 그같은 풍경을 두고 뭐랄 사람은 없지만 길거리에서 담배 빡빡 펴대는 아가씨와 함께 입 맛 별로 좋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1분 후, 까무잡잡한 남자 다섯과 한국(?) 여자 1명이 승강장에 앉았다. '까뚜로따..까로토..' 등의 발음을 보니 동남아 쪽이다. 인천 에어포트로 간다고 하면서 여자가 간식을 사오는 중. 한국 관광 온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대한 임프레션이 좋다고, 서울도 뷰티풀하고, 또 오고 싶다, 자기들은 일루일루에서 왔으며 보라카이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가이드(?) 여자가 왔길래 같이 왔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필리핀 사람이라고 했다. '(흰 피부 때문에) 유 룩스 라이크 코리안'했더니 모두가 푸헤헤했다.

#2. 동년 동월 동일. 집에 왔다가 6시 10분 신촌 n매장 들러 광화문, 다동, 서린동, 다시 무교동에 8시 30분 도착

귀가하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비가 계속 내린다. 일찍 문닫은 서점 천막 밑에서 물기를 닦고 라디오를 꺼냈다. AFN은 음악이 좋다. 요즘 뉴스 시간에는 '헤즈볼라' 소리가 빠지지 않는다.

CUSHION 중, 정말 오랜만에 'Who’ll Stop the Rain'이 잠깐 흘렀다. 음악에 '올디스 벗 구디스'라는 말이 있듯 시간이 지나도 다시 듣고 싶은 곡.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그룹 C.C.R의 이 노래는 베트남 전쟁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그 당시 용돈을 아껴 빽판매장 구석에서 수 시간을 뒤적여 사모은 음반이었다. 그땐 꿈이 레코드가게 차리는 것이었는데..

e은행 365코너에서 입금을 확인하고(아직 안되었음) 나오는 순간, 여자가 우산을 개면서 들어갔다. 나는 캔커피를 하나 커내 마시면서 과거 j은행 건물을 바라 보았다. 엄지 손가락을 추켜 올리며 제일이라던 그 은행은 외국에서는 금고로 치는 곳에 팔렸고 h은행도 c은행이 팔렸다. 그나마 c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가 길다. 하긴 동남아도 뱅크가 아니라 구멍가게로 보였으니 미국 자본이 우리를 어떻게 요리한다는 것은 결론부터 나와 있다.

아까 들어간 여자는 카드 전화기에 대고 이제는 통곡을 하고 있다. CD기에 다가간 몇몇 남자들이 오히려 어색해 할 정도로 10분 20분..을 앉았다 일어서며 흐느끼고 있다.

여자들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랑을 잃는 경우에 종종 저런 모습을 보인다. 그런 여자라면 남자를 도둑놈, 사기꾼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으며,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노래하지도 않는다. 이 순간까지 그를 사랑했으며 끝까지 사랑하지 못할 바엔 죽음을 택하겠다는 부류가 대분분이다. 같이 사기를 칠려고 했거나 그 놈과 같은 무리의 도둑녀인 경우, 이별 따위 때문에 결코 울지 않는 법이다.

그녀가 나올 때, '아가씨..많이 아프시죠? 음..사랑이 이토록 목메게 아파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특히 남녀간에..한 사람에 대한 사랑일수록 가치없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날은 의외로 빨리 옵니다. 특별한 사랑이라구요? ..나중에는 슬퍼한 자체를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같은 레퍼토리를 써먹으면서)우리는 하나에 방황할 때 두 가지를 잃습니다..'라고 말하면,
'니가 사랑이 먼 줄 알어?'라며 쏘아 부칠 것만 같았다. 혹은, '날 궂으니 별 꼴이 다 있네, 친구가 백혈병 걸렸다기에 슬퍼서 그랬는데..'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담배를 한 대 피고나니 그녀도 어디론가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파란불이 켜진 신호등을 보며 쏜살같이 달렸다. '우리'라는 타인들과 부딪치지 않기위해 몸을 자의적으로 흔들었다. 내가 뛰는 길이 나의 길임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나의 권리만은 아니다. 때론 곁눈질을 하면서 나의 길에서 나 아닌 사람의 길을 막아서는 안된다. 충돌이 일어날 경우 나의 전복이 그들의 전복이기에 내가 전복되지 않기 위해 나의 의무를 다하면서 달려야 한다.

아마 우주도 그럴 것이다. 인력이니 장력이니 하는 것 때문에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처럼 오묘하게 스치고 때론 충돌하고 깨지고 움직이거나 또 가까이 가거나 거기에 가만이 있거나..그러면서 잊혀지고 파괴되고 탄생되고 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그 속의 별들도 그렇게 공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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