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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 <칼럼>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seoulpost서울포스트 2006. 8. 9. 16:54
<칼럼>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인간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출판사에서
최복현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6/08/06 22:35)

정치인들은 편 가름을 잘해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쪽을 선택하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쉽게 말해 20/80의 법칙이다. 80을 내편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 80이라는 숫자는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곧잘 평등이니 양극화의 해소니라는 말로 대중을 선동한다. 대부분 80에 해당하는 숫자는 불평등을 공감하고, 양극화에서 아래쪽에 속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은 잘 갈라 놓았는데, 그 해결책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 그 80이란 숫자는 무의미해진다.

사람은 그 불합리함이 해결된다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전략을 제대로 써서 80을 내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정독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인간이 왜 불평등하고, 왜 불평등하다고 느끼며, 불평등할 수 밖에 없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그 불평등을 말로만이 아니라 제대로 해결하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자유란 즙이 많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나 질 좋은 포도주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익숙해진 튼튼한 체질을 유지하거나 더욱 강하게 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거기에 맞지 않는 허약한 체질은 오히려 압도하고 허하게 하며 취하게 만든다. 일단 지배받는 데 익숙해진 국민은 이미 지배자 없이 지낼 수 없게 된다.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들은 자유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그들은 참된 자유와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므로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의 족쇄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스스로를 내맡기게 된다.” -책세상 출판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그런데 사람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고, 평등하지 않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평등이란 말은 듣기엔 좋지만 그 평등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옆집 철수는 나보다 키가 크다. 그런데 나는 키가 작다.’ 라든가 ‘김씨는 아주 빠르게 달리는데 나는 빠르지 않다.’박씨는 아주 미남인데 나는 그다지 잘 생기지 못했다.’라고 한다면 이는 평등한가 아니면 불평등한 것인가? 분명 우리는 이를 불평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천부적으로 불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타고난 불평등에 대하여는 토를 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등이라는 말, 평준화란 말에 매혹된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타고난 불평등을 극복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역에 대해서는 침해하지 않으려 한다. 즉 이러한 불평등은 불평등으로 여기지 않으며, 이 이후에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해서만 불평등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루소는 “인간은 본래 서로 평등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종류의 동물이든 여러 가지의 물리적 원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몇몇 변종들을 발생시키기 전에는 모두 평등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말대로 아무런 지식이나 인간의 앎이 대두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인간은 평등하다. 하지만 소유의 개념이나 평가의 개념으로 넘어가면서 불평등의 문제는 대두되었을 것이다.

가령 높은 곳에 위치한 열매를 따야 할 때 키가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의 유불 리의 차이라든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먹을 것을 취할 때 그 양이 부족하면 빨리 거기에 이르는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 그 빠르기의 차이, 오늘날에 와서는 미모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출하는 분야가 다를 때, 느끼는 유불리의 차이에서도 타고난 불평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루소가 인간은 본래 평등하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이 불평등은 불평등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일 것이다. 루소가 동의하든 말든 불평등의 기원은 결국 상대비교에 따라 발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소유의 개념을 알게 되고, 공통으로 가진 자원의 양이 충족되지 않을 때, 여기서 발생하게 되는 부족함을 채우려는 욕구로 말미암은 경쟁에서 불평등은 비롯되는 것이다.

“원시 상태에서는 이와 달리 집도, 오두막도 없고 어떤 종류의 재산도 없이 각자 우연한 기회에, 그리고 대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거처를 정하곤 했다.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욕망에 따라 우연히 결합했으므로, 그들이 서로 주고받고자 했던 이야기를 대변하는 데 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헤어지는 일 역시 쉬운 일이었다........ 지식의 눈에 눈이 어두워지고 정념에 시달려 자기 처지와는 다른 처지에 대해 추론하는 미개인이 있었다면, 이러한 존재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을 것이다.”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거창하고 난해한 내용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은 구호처럼 불평등에 관해 이야기 하지만 그 본질적인 것은 알려하지 않는다는 데서 그는 논제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 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소위 정치인들이 우리를 위한답시고 평준화를 이야기 하지만 이는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평준화시키려면 문제는 간단하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맞추어 주면된다. 그러려면 공부를 아주 못하는 아이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공부 잘하는 아이의 수준에 오르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이제 답은 분명해진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공부를 더 이상 못하게 하여 맞추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등이란 말, 평준화란 말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지만 결국 하향 평등, 하향 평준화만 가능한 것이다.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불평등에 관해서는 누구나 불평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넋두리는 늘어놓을 수 있을 문제에 불과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지 않았다면 인간불평등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런 생존의 욕구 이외에도 다양한 욕구를 가진 요상한 존재이다. 이런 다양한 욕구들 때문에 여타의 다른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서만 다른 종을 해치거나 하지만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다른 종을 침해할 뿐 아니라 동종 간에도 격렬한 투쟁을 하는 이상한 동물이다. 필요이상을 소유하려는 습성, 필요이상의 힘, 필요이상의 섹스상대 등 무수하게 많은 욕구를 한없이 분출해내는 인간이란 동물에겐 다양한 불평등이 수없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의 틀에서 인간은 공유라는 개념과 사유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 결국 인간은 사유재산의 틀 속으로 들어서면서 불평등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 여타의 동물들과 달리 갖가지 다른 재능과 능력의 차이를 가진 인간이 동일한 노력, 동일한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나마 원시사회에서의 단순 사회에서는 그 능력과 소유유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지만 다양하게 변해가는 사회에 이를수록 그 차이는 너무나도 벌어지는 것이다. 이제야 인간은 불평등이라는 용어를 생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루소와의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여행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원시상태의 인간은 자기 생존과 자기 보존에 대한 관심이나 욕구만 있었지 그 이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원시의 인간이 문명의 이름을 입고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시작은 사화화이다. 그 사회화의 시작은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이었다. 사회적 동물이 된 인간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고, 자유와 억압이라는 것도 체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소유라는 개념에 눈을 뜬 인간의 욕구는 필요이상의 것을 차지하려는 사움을 벌이게 된다. 그러면서 과다하게 가진 자와 필요한 만큼도 갖지 못하는 빈자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제 불평등의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소유와 힘의 불평등을 체험한 인간은 더 나아가 이제까지는 불평등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동물적인 불평등까지도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요컨대 신체적인 불평등이다. 타고난 불평등은 인간의 몫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불평등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루소의 말대로 원시상태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진보한 역사는 다시 쓸 수 없는 것이 숙명이다. 수많은 인간, 진보할 대로 진보한 각양각색의 인간이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그 불평등을 느끼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살수 있는 방법은 서로 협력해서 살 줄 아는 공동체의 의식, 즉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일 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 칼럼니스트 문필가 최 복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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